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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제 (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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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영제는 남월의 제3대 왕으로, 남월 문왕 조말의 아들이다. 기원전 135년 민월의 침공으로 전한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태자 신분으로 장안에 들어가 숙위 생활을 했다. 문왕 사후 왕위를 계승한 조영제는 감단 출신 규씨를 왕후로 삼고 조흥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이로 인해 남월 내분 발생의 원인을 제공했다. 조영제는 한나라의 입조 요구를 거부하고 아들 조차공을 대신 보냈으며, 재위 12년 만에 사망하여 조흥이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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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제 (남월)
기본 정보
이름조영기 (趙嬰齊)
로마자 표기Zhao Yingqi
베트남어 표기Triệu Anh Tề
묘호명왕 (明王)
로마자 표기 (묘호)Zhao Ming Wang
베트남어 표기 (묘호)Triệu Minh Vương
왕위
계승남월
재위 기간기원전 122년 – 기원전 115년
사망기원전 115년
이전 통치자조말
후임 통치자조흥
가문
왕조조씨 (趙)
기타
출생 정보알려지지 않음
사망 정보원정(元鼎) 2년 (기원전 115년)
부친문왕
배우자규씨 (樛氏)

2. 생애

기원전 135년, 민월의 침공과 전한의 개입, 아버지 문왕의 건강 문제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조영제는 왕위에 올랐다. 조영제는 한나라와의 관계, 왕위 계승 문제에 직면했다.

조영제는 문왕의 아들로, 한나라에서 숙위(宿衛) 생활을 했다. 장안에 가기 전 남월에서 얻은 아내에게서 장남 조건덕을 얻었으나, 장안에서 감단 규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조흥을 낳았다. 남월 왕위를 계승한 후 규씨를 왕후로, 조흥을 태자로 삼아달라고 무제에게 요청했고, 무제는 이를 허락했다.

무제는 조영제에게 여러 차례 한나라에 입조하라고 요청했지만, 조영제는 한나라에 얽매이는 것을 꺼려 아들 조차공을 대신 보냈다.

기원전 113년, 조영제는 재위 1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태자 조흥이 왕위를 이었다.

2. 1. 즉위 전

기원전 135년, 민월왕 추영이 남월을 침공하자, 문왕전한에 구원을 요청했다. 무제는 요청을 받아들여 민월과의 충돌을 평정하고 중대부 엄조를 파견하여 사후 처리를 하는 동시에, 문왕에게 장안으로 가서 무제를 알현하도록 종용했다. 무제에 의해 장안에 억류될 것을 두려워한 문왕은 병을 핑계로 입조를 거부했지만, 태자였던 조영제를 입조시켜 숙위(宿衛)에 참여하게 했다. 원수 원년 문왕은 병상에서 한나라에 조영제의 귀국을 요청했고, 같은 해 문왕이 훙거하자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영제는 장안에 가기 전, 남월의 아내를 들여 장남 조건덕을 낳았지만, 장안에서 숙위 임무를 맡게 되자 감단 규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조흥을 낳았다. 남월 왕위를 계승한 후, 조영제는 무제에게 규씨를 왕후로, 조흥을 태자로 책봉할 것을 상주했고, 무제도 이를 허락했지만, 이는 태자 책봉을 둘러싸고 장래 남월에서 발생할 내분의 원인이 되었다.

2. 2. 왕위 계승 분쟁

기원전 125년, 문왕이 병으로 눕자, 한나라에 있던 아들 찌에우아인떼(趙嬰齊)를 불러오도록 요청했다. 같은 해 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찌에우아인떼가 남월의 왕이 되었다.

명왕(明王) 찌에우아인떼는 한나라에 가기 전, 정실 부인에게서 맏아들 찌에우끼엔득(趙建德)을 얻었다. 한나라에 들어가 장안에서 숙위(宿衛)로 있을 때, 감단(邯鄲) 규씨(樛氏)의 딸에게서 찌에우흥(趙興)을 얻었다. 남월 왕이 된 후, 명왕은 규씨를 왕후로, 찌에우흥을 태자로 삼았다. 전한 무제도 이를 허락했으나, 이로 인해 남월에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전한 무제는 명왕에게 여러 차례 한나라에 입조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명왕은 한나라에 얽매이는 것을 꺼려, 아들 조차공(趙次公)을 대신 보내 숙위(宿衛)를 맡게 했다.

기원전 113년(재위 12년), 명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찌에우흥이 왕위를 이었다.

2. 3. 한나라와의 관계

기원전 135년, 민월왕 추영이 남월을 침공하자, 문왕 조말전한에 구원을 요청했다. 무제는 요청을 받아들여 민월과의 충돌을 평정하고 중대부 엄조를 파견하여 사후 처리를 하는 동시에, 문왕에게 장안으로 가서 무제를 알현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문왕은 무제에 의해 장안에 억류될 것을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입조를 거부하고, 태자였던 조영제를 입조시켜 숙위에 참여하게 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병상에 있던 문왕은 한나라에 조영제의 귀국을 요청했고, 같은 해 문왕이 훙거하여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영제는 장안에 가기 전, 남월에서 아내를 들여 장남 조건덕을 낳았지만, 장안에서 숙위 임무를 맡게 되자 감단 규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조흥을 낳았다. 남월 왕위를 계승한 후, 명왕은 무제에게 규씨를 왕후로, 조흥을 태자로 삼을 것을 상주했고, 무제도 이를 허락했지만, 이러한 태자 책봉은 훗날 남월에서 내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무제는 즉위 후, 남월에 자주 사자를 파견하여 명왕의 입조를 완곡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명왕은 입조 후 한나라의 법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아들 조차공을 장안으로 보내 숙위에 참여하게 하는 것에 그쳤다.

원정 2년(기원전 115년)에 명왕이 병사하자, 태자 조흥이 왕위를 계승했다.

2. 4. 죽음

기원전 113년, 재위 12년에 명왕(明王) 조영제가 훙서(薨逝)하니, 태자 조흥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3. 가계

趙嬰齊|조영제중국어남월 문왕의 아들로, 한나라에 입조하기 전 정실 부인에게서 장남 찌에우끼엔득을 얻었다. 한나라 장안에서 숙위로 있을 때 감단 규씨의 딸에게서 찌에우흥을 얻었다.

조영제(趙嬰齊)의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문왕 조말
정실 부인(이름 미상)
아들 (장남)찌에우끼엔득정실 부인 소생
부인감단 규씨한나라 감단 출신
아들 (차남)찌에우흥감단 규씨 소생, 남월 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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